거제, 파도 위에 새겨진 역사: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의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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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사람들이 남긴 흔적, 산달도 패총
거제의 역사는 얼마나 깊을까요? 놀랍게도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거제 지역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정착해 살았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는 유적이 바로 산달도 패총입니다.
패총이 뭔지 아시나요? 옛날 사람들이 조개나 물고기를 먹고 버린 껍데기가 쌓여 만들어진 일종의 쓰레기 더미입니다. 그런데 이 쓰레기 더미가 고고학자들에게는 보물창고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려주는 타임캡슐이거든요.
산달도 패총에서는 후육무문 토기 등 신석기 전반의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발견은 한국 신석기 문화 연구에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수천 년 전 거제 바닷가에서 조개를 캐고 물고기를 잡으며 살았던 사람들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지 않나요?
토기와 석기로 본 거제의 선사문화
공고지 유적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곳 역시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더 흥미로운 건 아주현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입니다. 삼한시대 마제석검과 곡옥 같은 정교한 유물이 나왔는데, 이는 거제 지역의 토기 제작과 석기 제작 기술이 다른 지역보다 앞서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마제석검은 돌을 갈아서 만든 검입니다. 청동기나 철기가 없던 시대에 이렇게 정교한 석기를 만들려면 상당한 기술력이 필요했습니다. 곡옥은 구부러진 옥으로 만든 장신구인데, 이는 단순한 실용품이 아니라 권위나 신분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거제가 선사시대부터 문화적으로 상당히 발전된 지역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변한의 귀틀집, 하늘로 날아간 영혼
시간을 조금 더 앞으로 돌려 고대 변한 시대로 가볼까요? 변한은 삼한시대 남쪽 지역에 있던 나라들을 통칭하는 이름입니다. 거제도 이 변한 지역에 속해 있었습니다.
당시 변한 사람들은 어떤 집에 살았을까요? 놀랍게도 통나무를 가로 쌓아 올린 귀틀집에 살았습니다. 귀틀집은 통나무를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쌓아 올려 만든 집인데, 추운 지방에서 주로 사용하는 건축 방식입니다. 그런데 상대적으로 온화한 남쪽 지역인 거제에서도 이런 방식을 사용했다는 게 흥미롭죠.
더 놀라운 건 그들의 장례 문화입니다. 죽은 사람을 묻을 때 새 깃털을 함께 넣었다고 합니다. 왜 새 깃털이었을까요? 영혼이 새처럼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라간다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육체와 영혼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영육분리 관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수천 년 전 사람들도 사후 세계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는 사실이 묘하게 가슴을 울리지 않나요?
상군의 수수께끼, '두루다'의 의미
삼국시대로 넘어오면 거제는 상군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또 다른 이름은 두로국이었죠. 13세기 말까지 상군의 치소(행정 중심지)는 거림리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상군'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을까요? 한 가지 흥미로운 견해가 있습니다. '상(裳)'이라는 한자가 '두루다', 즉 '주위를 둘러싼다'는 의미를 가진 우리말에서 유래했다는 것입니다. 거제가 섬이라서 바다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다는 지리적 특성이 이름에 반영된 거죠. 지명 하나에도 이렇게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니, 역사는 정말 흥미롭습니다.
고려시대 거제, 변방에서 외교 중심으로
고려시대 거제의 운명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왜구의 끊임없는 침략, 삼별초 항쟁의 거점, 무인집권기 의종의 유배지로 사용되는 등 민족사에서 변방으로서의 역할에 머물렀습니다. 중앙 권력에서 멀리 떨어진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정치적 격변기마다 휘말리게 된 거죠.
의종이 유배된 이야기를 아시나요? 고려 무신정변 때 폐위된 의종 임금이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결국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한때 한 나라의 왕이었던 사람이 외딴 섬에서 생을 마감한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었을까요?
반복해와 거제 반씨의 대일 외교
하지만 고려 말, 거제는 새로운 역사를 쓰기 시작합니다. 바로 반복해를 비롯한 거제 반씨 집안이 대일 외교 능력을 발휘하며 중앙 사족으로 성장한 겁니다. 변방의 지방 세력이 중앙 무대에 진출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반복해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습니다. 당시 왜구 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고려 조정에 반복해의 외교력은 매우 귀중한 자산이었습니다. 섬에서 자란 덕분에 바다를 통한 교류에 익숙했고, 일본의 사정도 잘 알고 있었던 거죠. 거제가 단순한 변방이 아니라 해양 외교의 중심지로 떠오르는 순간이었습니다.
조선의 방패, 왜구를 막는 최전선
조선 초기 가장 큰 고민거리는 뭐였을까요? 바로 왜구입니다. 고려 말부터 계속된 왜구의 침입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조선 조정은 왜구 방어를 위해 해안 지역의 군사 방어를 대폭 강화했고, 거제는 그 최전선에 섰습니다.
거제에 세워진 누정들의 이름을 보면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무이루, 해안정, 진남루, 제승정 등 이 이름들에는 모두 외적을 물리치고 싶다는 간절한 염원이 담겨 있습니다. '진남루'는 남쪽의 적을 진압한다는 뜻이고, '제승정'은 승리를 거둔다는 의미입니다. 건물 이름 하나하나가 기원문이나 마찬가지였던 거죠.
누정에 담긴 외적 방어의 염원
사등리에 있던 읍성에는 재미있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물이 부족했던 겁니다. 성 안에서 많은 사람이 생활하려면 물이 충분해야 하는데, 사등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고정리로 읍성을 옮기자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읍성 위치를 정하는 것조차 생존의 문제였던 시대였습니다.
당시 거제 사람들에게 왜구는 단순한 외적이 아니라 생존을 위협하는 실존적 공포였습니다. 언제 바다 너머에서 적선이 나타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살았던 거죠. 그래서 성을 쌓고, 진을 만들고, 군사를 훈련시키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습니다.
옥포만의 함성, 임진왜란 첫 승전보
1592년 4월, 조선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겁니다. 육지에서는 조선군이 연전연패했습니다. 한양이 함락되고 선조 임금은 북쪽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나라가 망할지도 모른다는 절망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그런데 바다에서 희망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바로 거제 옥포만에서 조선 수군이 첫 승리를 거둔 겁니다.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옥포 바다에서 왜선 30여 척(일부 기록에는 50여 척)을 격파했습니다.
태산처럼 침착하라, 이순신의 전략
이순신 장군은 출전에 앞서 장수들에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덤벙대지 말고 태산처럼 침착하라."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건 냉철함과 침착함이었습니다. 흥분해서 함부로 돌진하면 이길 수 있는 싸움도 질 수 있습니다.
이 전투에서 조선 수군은 왜군의 갑옷, 의관, 쌀 300여 섬 등을 전리품으로 얻었습니다. 물질적 승리도 중요했지만, 더 중요한 건 심리적 효과였습니다.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거죠.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섣부른 출전 명령을 거부하기도 했습니다. 왜적의 간사함을 알고 있었고, 바닷길이 험하다는 이유를 들었습니다. 상부의 명령이라도 승산이 없으면 무리하게 따르지 않는 지혜를 보인 겁니다. 진정한 장수는 부하들의 목숨을 함부로 내던지지 않습니다.
옥포해전의 승리는 단순한 전술적 성공이 아니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조선 백성들에게 희망을 준 전략적 승리였습니다. 거제 옥포만은 그렇게 구국의 성지가 되었습니다.
일제의 그림자와 독립의 외침
근현대로 넘어오면 거제는 또다시 외세 침략의 최전선에 섰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 중 일본 해군이 송진포를 점령했습니다. 같은 해 한일의정서가 강압적으로 체결되면서 일본은 한반도의 철도와 통신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일제강점기 헌병경찰 통치 하에서 민족운동은 가혹하게 탄압받았습니다. 하지만 거제 사람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주목, 옥상목, 윤택근, 이공수, 지익강 등 거제 출신 인사들이 독립운동의 불꽃을 지폈습니다.
강습소에서 시작된 민족 계몽 운동
이들은 총과 칼 대신 교육을 무기로 삼았습니다. 강습소를 설치해 민중을 계몽하고 반일 의식을 고취시켰습니다. 글을 가르치고, 역사를 가르치고, 민족정신을 일깨웠습니다. 교육이야말로 장기적으로 일제에 저항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였던 거죠.
하지만 일제는 이를 좌시하지 않았습니다. 강습소 활동을 하던 독립운동가들은 하나둘씩 검거되어 투옥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다는 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요?
거제의 독립운동가들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겁니다. 역사를 기억한다는 건 바로 이런 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한국전쟁, 피난민과 포로의 섬
한국전쟁은 거제에 또 다른 비극을 가져왔습니다. 평양, 흥남 등 북한 지역에서 피난민들이 거제 장승포에 대거 몰려왔습니다.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고 남쪽으로 내려온 사람들, 그들에게 거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낯선 땅이었습니다.
문제는 배급이었습니다. 갑자기 인구가 폭증하자 식량과 생필품이 부족해졌습니다. 배급을 둘러싸고 지역에서 소요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전쟁은 전선에서만 벌어지는 게 아닙니다. 후방에서도 생존을 위한 또 다른 전쟁이 벌어졌던 겁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서는 포로들에게 미군복과 식기를 지급했습니다. 포로들은 도로 정비와 시설물 제작 같은 작업을 했습니다. 겉으로는 인도적 처우처럼 보였지만, 수용소 안에서는 이념 갈등으로 인한 폭력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거제의 역사는 이처럼 외세 침략에 맞선 치열한 생존과 저항의 순간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거제는 한반도 역사의 파도를 온몸으로 맞아왔습니다.
결론: 파도는 계속 치지만, 바위는 남는다
거제의 역사를 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패턴을 발견하게 됩니다. 외부의 위협이 끊임없이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왜구, 임진왜란, 일제강점, 한국전쟁까지. 거제는 늘 역사의 최전선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거제는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선사시대 사람들이 조개를 캐며 생존했던 것처럼, 변한 사람들이 귀틀집을 짓고 살았던 것처럼, 고려시대 반씨 집안이 외교로 활로를 찾았던 것처럼,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이 옥포에서 승리했던 것처럼,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강습소를 열었던 것처럼. 거제 사람들은 매번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파도는 계속 바위를 때립니다. 하지만 바위는 그대로 남습니다. 거제의 역사가 바로 그렇습니다. 수천 년 동안 역사의 파도가 거제를 덮쳤지만, 거제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산달도 패총은 왜 한국 신석기 연구에 중요한가요?
산달도 패총은 신석기시대 전반기 유물이 출토된 매우 중요한 유적지입니다. 특히 후육무문 토기 같은 초기 신석기 토기가 발견되어 한반도 신석기 문화의 시작과 발전 과정을 연구하는 데 핵심적인 단서를 제공합니다. 패총은 당시 사람들의 식생활, 도구 사용, 생활 방식을 보여주는 타임캡슐과 같습니다. 조개껍데기 층 사이에서 토기 조각, 석기, 뼈 도구 등이 함께 발견되어 신석기인들이 어떻게 바다 자원을 활용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아주현지에서 발굴된 마제석검과 곡옥은 거제 지역의 석기 제작 기술이 다른 지역보다 앞서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이런 발견들은 거제가 선사시대부터 문화적으로 발달한 지역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Q2. 이순신 장군이 옥포해전에서 "태산처럼 침착하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전투에서 가장 위험한 건 흥분과 조급함입니다. 병사들이 흥분해서 무질서하게 돌진하면 전열이 무너지고 적의 함정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순신 장군은 냉철한 판단력과 침착함이 승리의 핵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습니다. 특히 해전은 육지 전투와 달리 파도, 바람, 조류 같은 자연 조건을 고려해야 하므로 더욱 신중한 지휘가 필요합니다. "태산처럼 침착하라"는 명령은 병사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동요하지 말고 명령 체계를 따르라는 뜻이었습니다. 이런 철저한 통제력 덕분에 조선 수군은 수적으로 우세한 왜군을 격파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순신은 조정의 섣부른 출전 명령도 거부할 만큼 신중한 전략가였습니다. 승산 없는 전투로 부하들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도 훌륭한 리더십의 일부였습니다.
Q3. 일제강점기 거제의 독립운동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나요?
거제의 독립운동은 주로 교육을 통한 민족 계몽 운동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주목, 옥상목, 윤택근, 이공수, 지익강 등 거제 출신 인사들은 강습소를 설치해 민중에게 한글과 역사를 가르치고 민족의식을 고취했습니다. 일제의 식민 통치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장기적으로 민족정신을 지키고 교육을 통해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제는 이런 활동을 반일 운동으로 간주해 가혹하게 탄압했습니다. 강습소 활동을 하던 많은 독립운동가가 검거되어 투옥되었고, 일부는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거제의 독립운동가들은 전국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지역 차원에서 끊임없이 저항의 불씨를 지핀 숨은 영웅들이었습니다. 이들의 헌신이 있었기에 광복 후 거제가 빠르게 재건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