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5일, 모든 국민이 6·25전쟁을 떠올릴 때 장승포 사람들은 이것을 떠올릴지도 모릅니다. 당시 1963년 5월부터 8월까지 전국적으로 폭우가 내렸고, 거제에는 6월 초부터 장마가 왔습니다. 19일 태풍 셀리(Selly)를 시작으로 24일~25일 이틀 동안 500mm의 엄청난 폭우로 6월 25일 오전 8시경 장승포동 474번지(구,장승포 시청 뒤편, 굴세미골)에 주택 6동 12세대가 완전히 매몰되는 산사태가 발생해 주민 61명이 사망하고, 현장 지시하던 경찰관 9명이 순직하는 끔찍한 자연재해가 있었습니다.
“모두 피신하라.”
당시 엄청난 폭우에 대피해 있던 주민들은 25일 아침 잠시 소강상태를 틈타 집에 가서 밥을 먹고, 짐을 챙기고 있었는데, 뒷산이 미심쩍어 올라가 보았던 생존자 김상태 씨는 위급하다고 느껴 “모두 피신하라.”고 외치며 내려왔고, 뒤이어 바로 뒷산이 한순간에 무너졌습니다. 산 사람이 그대로 토사에 묻혀 숨진 사람은 시체를 발굴해도 토사투성이로 얼굴을 구분하기 어렵고, 떨어져 나간 사지(四肢)를 찾으려는 유족들, 시체는 찾았지만, 일가족이 모두 죽어버려 울어줄 사람조차 없는 일도 있었습니다.
아비규환, 엄청난 슬픔과 참담한 순간
생존자 김상태 씨는 압사 직전의 3명을 구했고, 그다음 처와 아버지, 그리고 2남매의 시신을 찾았는데 결국 김상태 씨는 9명의 가족을 모두 잃었습니다. 산사태가 불러온 것은 지옥과 다른 바가 없었고, 아비규환에 엄청난 슬픔과 참담한 순간이었을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찾아온 1천여 명의 주민, 학생, 공무원 누구 할 것 없이 급한 마음에 가마니로 주변 잔해를 정리하는 작업을 도왔고, 산사태 발생 20여 일 만에 모든 시체를 발굴해 합동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그놈의 비가 사람들을 잡아 묵었다.”
그날 이후로 거제에는 이런 말이 공허하게 나돌았으며, 일부 언론에서는 거제도 압사 사건이라고도 명명했습니다.